본문 바로가기
내 영혼이 따수웠던 날들

발가락 서핑

by 살랑상아님 2012. 4. 25.

목욕탕에 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가 없었다.


목욕바구니를 탕 근처에 내려놓고 탕에 들어가 눈을 감고 잠시 몽롱한 상태에 접어들었다가, 인기척에 옆을 힐끗 보니 고운 아주머니께서 탕 중간에서 올라오는 거품에 발을 마사지 하고 계셨다.


음흉한 웃음을 띄며 나도 다리를 쭉 뻗어 발가락을 최대한 벌리고 발가락 서핑을 시작.


발가락 서핑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물살을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물살에 밀려 몸이 옆으로 밀리면 마사지는 고사하고 옆으로 밀린 몸을 추스리느라 움직임이 커지게 된다.

안 그래도 체력소모가 큰 수중전에서 불필요한 움직임은 피해야한다.


라면서 혼자 무슨 올림픽선수라도 되는양 혼자 (속으로) 으스대며 아주머니와 무언의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다. 왜냐면 우린 사이좋게 발가락을 탕에서 올라오는 거품을 향해 뻗고 있었고 50cm 내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모녀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


발가락 서핑에 지친 아주머니께서 무언의 패배를 외치고 탕에 고정하고 앉았던 그때, 나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살짝 내 목욕바구니 쪽을 돌아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다가온 긴 머리의 아이 엄마는 우리의 목욕바구니를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목욕바구니와 아이를 위한 작은 욕조를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괜스레 적대감이 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몸을 담그고 계신 평화로운 아주머니를 쳐다 본 후, 다시 탕에 누워버렸다. 


첨벙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어떤 꼬맹이가 아주머니와 나 사이에 들어와 있었다.


이건 정말 영락없는 세 모녀였다. 



우리는 그저 말없이 노곤노곤해진 몸과 몽롱한 정신상태로 그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조금 후, 나타난 그 아이의 엄마는 바로 그 아이엄마였다.


하지만 어쩌리, 우리 가운데에 끼어든 아이와 눈빛을 주고 받은 나는 그녀에 대한 적개심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아주머니 역시 자신의 목욕바구니를 그 아이엄마가 옆으로 밀어버렸다는 사실을 


"물 가져와 ㅡ "


하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가 알아버렸지만, 역시 아이와 눈빛을 주고받고, 아이엄마와 아이의 즐거운 목욕놀이를 지켜본 우리로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사우나에 가기 위해 탕을 잠시 나왔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자리가 나서 때를 밀어보려고 때밀이수건을 손에 껴보고 있는데 


옆에서 어느 할머니께서 여기도 저기도 아닌 채로 중간에 걸쳐 앉아 계신게 아닌다. 


이래저래 자리가 나려는데 그 아이엄마가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다는 이유로 다시 이도저도 아닌 가운데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으신 할머니, 


그때 마침 내 옆에서 자리를 떠나려는 움직임이 보여 


"할머니~"


하고 부른 순간, 나와 발가락 서핑을 즐긴 그 아주머니께서 재빠르게 자리를 차지하려 하셨지만, 

할머님께 양보하시고 다시 탕으로 사라지셨다.



아, 이 무슨 짧은 드라마인가 


목욕탕에 가만히 앉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다.



수면 위로 떨어진 물방울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우리


얕게, 넓게 물결을 만들어 낸다.


작은 원을 그리든, 큰 원을 그리든, 

수면 위에 그린 작고 큰 떨림처럼 


우리네 삶도 그렇게 크고 작은 떨림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사라지겠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