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다는 평을 얼핏 보고 이건 보지말아야지 했다.
영화를 많이 봐야지- 하던 새해 다짐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려던 찰나,
팀장님께서 준 광화문 시네큐브 티켓 두장은 가뭄에 내린 단비와 같았다.
친구에게 아무 영화나 편한 시간대로 골라보라고 하자 "비버"라고 하였다.
왜 안 보려고했을까?
대단하다.
늘 우울한 윌터 블랙이 급기야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고
술을 한 박스 사서 트렁크에 실으려는데 짐이 너무 많다.
아니, 짐이 너무 없다.
하지만 뭔가 빼내지 않으면 술을 실을 수가 없다.
버리려했기에 다시 얻은 비버인형
죽으려고 목도 매보고 투신도 시도했는데 결국 그는 티비에 깔린 채,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비버와 함께 ㅡ
비버, 미쳐버린 남편, 아빠, 사장
살기위한 몸부림
극도로 우울한 자신을 죽이고 그 모든 기억을 죽이고, 다시 태어나고자 했지만
새로운 허울을 얻을 수는 없어 선택한 비버
그의 육신은 그저 말 잘 듣는 비버의 하수인이 된다.
비버는 존재한다.
비버는 윌터 화이트이고 싶었다.
우울한 윌터 블랙을 다독여주는 윌터 화이트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자신감이 넘치는 윌터 화이트
안 될 것 같았던 일들이 비버로 인해, 이루어져갔다.
안 될 것 같았던 일들을 할 수 있었으나 무기력에 짓눌려버렸던 그로인해
물론 그는 그 사실을 점점 잊었지만
자신이 자신이 아닌 비버라는 자신감만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리는 것만 같았다.
비버의 뒤에 숨어서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잘 해내고 있었다.
보는 내내 불안했다. 이건 블랙코미디니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 못 돼서 윌터가 울게 될까.
어디서부터가 시작일까, 윌터가 자살해버리지나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를 미워하고, 남편을 의심하고 못 미더워하던 부인,
그들이 시작이었다.
오직 어린 아들만이 그를, 비버를 사랑해준다.
아내는 그가 과거로 돌아가길 바란다.
그의 과거가 그들의 무관심 속에 얼마나 처잠히 무너졌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가식으로 느껴지는 아내의 사랑
아버지를 증오하는 아들
다른 사람이 되어 본 적도 없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만 말한다.
조금이라도 우울한 윌터 블랙이 왜 우울해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어보긴 한 걸까?
윌터 블랙은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야했다.
싸우지 않는 자신은 넋이 나간채 현실을 외면하고 잠만 자는 산송장일 수 밖에 없다.
싸워서 이기든 지든 뭔가를 해야만 했고, 따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정신나간 소리라는 걸 자신도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고 싶은데
결국 그를 내쫓아버린, 그렇게 해야만 그가 산다는 그의 말을 무시해버린 그의 아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심정을 난 알 수가 없다.
좋아지면 그뿐인 건 아니겠지, 과거로부터 도망친다고 다가 아니겠지
평생 비버를 손에 달고 살 수는 없는거겠지.
그렇지만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를 버텨내는 그녀보다
현재를 사랑하며 미래를 꿈꾸는 윌터 블랙에게서 더 진정성이 느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를 믿고 지켜봐줄 수는 없었던 걸까.
그렇게 살 순 없어서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그에게 조금만 더 귀기울여 줄 수는 없었던 건가.
누군가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그의 아들은 치어리더 소녀의 졸업연설문을 대필해주기 위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자 한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는 그의 애정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깨닫는다.
거짓으로 잘 사는 척, 괜찮은 척, 그러지 말자고
윌터블랙은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모두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다.
오로지 가족만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를 도와줄 수 있었는데 ..
그는, 자신이 이룰 수 있었다고 자신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 모든 것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가족의 사랑마저도 애초부터 없었던 거라고, 이 세상엔 오로지 자신 밖에 없다고 그 모두를 미워하려고 하는 비버와 싸운다.
자기 자신과 싸운다.
그래도 아직 그들은 날 사랑한다고, 없어져야 할 것은 바로 그런 미움과 원망이라고
어둠은 빛을 잠식한다.
땅거미가 내려앉듯 이 세상의 모든 밝음은 모든 어둠으로 인해 뒤덮이게 된다.
따듯하게 밝혀주는 작은 촛불이,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그 빛이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고 쓰러지지 않게 보듬어줄 그 무언가가 없어지게 되면
급기야 작은 바람에도 아주 작은 상처에도 쓸리고 헤져 처참하게,
파르르 떨리는 한가닥의 하얀 연기만을 남겨둔 채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미쳐버린 걸 수도 있다.
그로칼랭이 생각났다. 이것도 하나의 정신분열증이려나
그 모든건 자신과의 싸움이다.
앞으로 나아갈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의지가 있다면 싸우고 깨부수어 그 상자 속에서 탈출해야한다.
다시 보고 싶다.
윌터 블랙이 라디오에서 티비에서 모두에게 말하던 바로 그것을 다시 듣고 싶다.
무엇인가를 잃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시 얻었다.
어둠은 그의 마음 속에서 가장 애타게 그리던 밝은 빛으로인해 아주 작은 그림자로 돌아간다.
그가 버리려다 다시 주워온 비버인형은
바로 그가 버리려던 그의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