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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수웠던 날들

에밀 아자르, 그로칼랭 - 우리는 모두와 같이 다르다!

by 살랑상아님 2012. 2. 15.

그로칼랭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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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삶을 발견하려면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기 안에서 자신을 탐구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아야 하고, 자신의 (그리고 타인의) 확신을 의심할 줄 알아야 하며ㅡ 


- 11, 장 프랑수아 앙구에, 그로칼랭 머리말



적어도 천만 명이 오가는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소요를 피하기 위해 품위 있게 행동하고 인구 통계학적으로 일반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로칼랭이라 이름 붙인 내 비단뱀과 있을 때는 다른 느낌이 든다. 내가 받아들여지고 존재에 둘러싸인 기분이 드는 것이다. 부모가 죽은 것이 확실할 때 남들은 어떻게 위안을 받는지 모르겠다.


- 50, 에밀 아자르, 그로칼랭



애정 때문이다. 애정은 내부에 구멍을 파고 자기 자리를 만들어놓지만, 막상 거기에 애정이 없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고 이유를 찾게 된다. 


- 62, 에밀 아자르, 그로칼랭



수십억 단위의 수를 계산하는 데 하루를 보낸 당신은 평가절하되어 0에 가까운 상태로 집에 돌아간다. 그때 찰리 채플린의 슬픈 희극처럼 가난하고 불안에 떠는 숫자 1은 애처로워진다. 나는 1이라는 숫자를 볼 때마다 도망치게 해주고 싶다. 1은 부모가 없어 고아원에서 혼자 자랐고, 뒤에서는 줄곧 0이 쫓아와 따라잡으려 하고 앞에서는 큰 수들의 마피아가 모두 그를 노리고 있다. 1은 난자가 없어 수정이 되지 않은 출생 전 증명서와 같다. 그것은 2가 되는 것을 꿈꾸며 쉬지 않고 달리면서도 늘 제자리이기 때문에 희극이 된다. 늘 미생물 상태인 것이다.


- 93


삶은 무의미 하기 때문에 진지한 문제가 된다.


- 93




야심이 큰 사람은 모두 요구와 주장을 한다. 그것은 사실상 파시즘이다. 


- 106



과학은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으니 언젠가는 콘센트에 접속만 하면 사랑받는 느낌이 들게 될 것이다.


- 108




연민이라니, 절대로 싫다. 이미 나 자신도 지겹도록 연민을 품고 있다. 끔찍했다. 나는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할 때 완전히 자유로운 기분이 든다.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고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는 자유 말이다. 기댈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당신의 손발을 묶어 가두고 그 자리에 없는 모든 것에 의존하게 만들고 출생 전으로 되돌려 당신 자신을 예상하도록 만든다. 


- 120 



이제 속임수는 됐다. 나는 가끔 모든 사람이 입술을 움직이지만 실제 흘러나오는 대사와 잘 맞지 않는 더빙된 영화 속에 사는 기분이 든다. 촬영 후에 녹음하는 것인데 가끔 녹음이 아주 잘되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 165



나는 상호 간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런 사치는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할 대상, 그것은 꼭 필요하다.


- 170



"귀찮게 굴지 마! 당신 볼일이나 보라고!"…… 그들에게 자존심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왜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게 좀 도와주지 않는 걸까?

불가능의 끝이 어떤 형태일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현 상태에서는 애무가 부족하다. 


- 172



손바닥 한 가운데에 생쥐 한 마리만 놓으면 그런 느낌이 든다. 그 순간에는 가슴이 따뜻해지고 머나먼 러시아에 흐르는 거대한 사랑 강이 본래 물길을 벗어나서 시베리아 한복판 같은 이 곳 파리로 흘러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 층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내 아파트까지 올라와 모든 것, 심지어 그 이상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든다. 마치 나 자신이 강력한 사랑 강의 따뜻한 손바닥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다. 


- 180



"이런, 당신 꼭 비단뱀 같아요. 사람들이 신경 써주는 것도 모르는 군요."

그리고 잃어버릴 사랑이 없는 사람처럼 제 갈 길을 가버렸다. 


- 182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다 그렇듯 나 자신이 쓸데없는 여분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 185



"(…) 사무실이며 기계들, 항상 똑같은 버튼을 누르는 것은 인간적이지 못해요. 이 일은 존경은 못 받을지 몰라도 훨씬 생기가 넘치고 변화무쌍해요. 더 사교적이고 인간적인 접촉이 있고 더 사적이에요.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즐기게 해주며 사는 거예요.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엉덩이는 그래도 계산기보다 생기가 있어요. 사람들이 서로 만나니까요. 외롭고 불행해서 여기 왔다가 좋아져서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 271



"오히려 내가 꼭 있어야 하고 내가 잊어버리면 멈춰버리는 시계를 찾는데요. 나만의 것 말입니다."


- 283



그런 식으로 손바닥에 참새가 날아와 앉기도 한다. 인내와 빵 부스러기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손바닥에 빵 부스러기와 참새를 얹은 채 인생을 살 수는 없다. 게다가 불가능으로 인해 참사는 결국 번번이 날아가버린다. 


- 284



원칙대로 행동하는 것이 인간 흉내 놀이의 규칙이자 위대한 시대의 양식이다. 올 테면 오라. 나는 두렵지 않다. 난 다른 사람들처럼 가면을 쓸 것이다. 두려운 것은 사무실 사환뿐이다. 그 개작식은 인류의 오류이다. 그는 탈피한 껍질을 바라고 요구한다. 


- 300



길을 잃지 않고는 길을 찾을 수 없는 법이다. 길을 찾지 못하는 단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 313



언제나 그렇듯 밤에는 파리 한 복판에서 땅이 아프리카 사막처럼 거대하게 나를 삼켜왔다. 배려는커녕 관심의 완전한 부재가 누구의 것도 아닌 온전한 파괴력을 가지고 나를 덮쳐온다. 


- 334 




나는 그 자리에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안다.

그것은 있었다. 

내밀어진 손을 그렇게 많이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평소에 다는, 장갑이 끼워진 가짜 손이 아니었다. 어느 주먹을 보나 모든 면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고 건져주는 진짜 손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손이 생겼고, 거기에서도 나의 나약함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 342



"펑! 내 작은 가슴이 펑 터져요!"

(…)

"펑! 펑! 생활필수품으로!"

"나는 모두와 같이 다르다!"

"말해라! 말해라!"

"나는 철저히 요구한다!"

"자, 겁내지 마라!"

"나약함이 눈을 떠야 한다!"


- 343







'가면의 생'에 앞서 나온 작품인데 나는 '가면의 생'을 읽은 후 '그로칼랭'을 읽었다. 

비단뱀을 기르는 파리의 외로운 쿠쟁,이 어느 한 편의 나의 모습과 닮아서 웃음이 나왔다.

말하자면 짝사랑하는 드레퓌스씨에게 말도 못 건 주제에 마음 속에선 이미 결혼한 상태라는 점


아 27살 상아의 짝사랑은 이렇듯 순수하고 막연하다. 


사실 현재를 살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꾸준히 사랑받는 것이겠지. 시대를 아우르는 작품이라니!

문학이란 정말 위대해!!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에 대해 알고 타인의 확신에 의심을 품는 것.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에 대해 분석하고 타인의 말들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순수한 자기 자신으로서 타인에게 전적인 사랑을 받는 방법이 아닐까.

비록 쿠쟁은 비단뱀의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눈빛 속에, 

아무런 이해관계와 전후 사정이 없는 무조건 적인 애정으로 하여금 존재에 둘러싸인 기분을 느끼고 있지만, 


매뉴얼대로 행동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고독함과 사랑받고 싶은 그 애처로운 마음을 동정받기 싫기 때문에 숨겼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책을 읽던 때에 누군가로 부터 "힘내."라는 말을 들었는데 난 정말 딱 '비단뱀같이 행동했다.' 나를 신경써주고 있는 사람에게 "신경쓸거 없어."라고 해버린 것이다. 


애무가 부족하다. 너무 혼자서 생각하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버려서, 고집불통 벽창호가 된 느낌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그 대목을 읽는 순간.


그 '힘내'라는 말을 한 사람은 쿠쟁과 비교해보자면 사환정도일까나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꿰뚫어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느낌

처음엔 거부감이 들다가, 그 끊임없는 손길에 "나약함이 눈을 뜨고, 모두와 같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겉으로 멋지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나약함, 그 쓸쓸함





사랑처럼 다가와서 애정이라는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놓고 쏙 빠져나가 버린 그 잔혹함


서로 사랑하는 사치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사랑할 대상이 필요하다. 


철저하게 내 것이 필요하다. 





내가 아니고서는 안 되는 사람, 철저하게 내게 책임이 있으며 나에게 의지하는 사람, 


곧, 나를 버릴 수 없는 사람 


쿠쟁은 애정의 커다란 구멍을 감당하기엔,

금방 녹아 없어질 허울로 채우기엔 너무 여리고 섬세하다.


언젠가 내가 썼던 글이 생각났다. 


신기루는 갈증을 증폭시키며 허무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는 식의 글이었는데 그게 딱 애정의 커다란 구멍과, 철저하게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신기루를 경험하고 싶지 않다. 나와 쿠쟁이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이유이다. 


쿠쟁은 짝사랑에 실패하고 그녀의 모습에 상처받아 비단뱀으로 분해버린다. 

숨어들고 싶어서,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고 싶어서,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멀리 우주에서 나를 바라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나를 바라본다는 것,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 보고 - 그것이 비록 현실로부터의 도주를 꾀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자기 자신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한 행동을 잊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예전에 친구들이 나에게 "의식하고 있는 다중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었는데 


지금도 별반 다를 건 없다. 


어쩜 그렇게 순간순간에 충실한지ㅡ 


물론 쿠쟁은 지나치긴 하다, 생쥐를 집어 삼킬 정도니까 정신병원에 가지 ㅡ 


하지만 적절한 수준에서 다른 존재가 되어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그 다른 존재로써의 삶 역시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것같다. 


예전에 도니가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애정결핍일 확률이 높대요."라는 말을 해줬는데, 정말 그런 것같다. 


모든 것에 쉽게 애착을 갖는다는 쿠쟁은 확실한 애정결핍이다. 


애정의 구멍이 뻥 뚫려버려, 시계에게 그 모든 책임과 사랑을 쏟아버리게 되어버렸지만, 


마음이 약하고 착한, 소심해서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정말 소중히 아끼고 보듬어 줘야 한다. 


귀여운 쿠쟁, 우리는 모두 같이 다르다!!! 



사실, 나도 애정의 구멍이 뻥 뚫여있는데, 이 젊은 나이에 넘쳐나는 시간이 아깝고, 넘쳐나는 체력이 아까워서 연애를 안 한다는 말을 한다. 

핑계를 대자면 나는 사과를 좋아하기 때문에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나 쿨의 그 노래처럼 그런 비극이 발생할까봐 - 정이 들어 그 애정의 구멍에 반도 못되게 들여놓고는 나중에 배신할까봐 - 


정말 그건 어려운 일이다.  



문득 생각난 '또 내 이야기'

어린 시절에 나는 내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
외계인 말이다!! 모양도 행동도 생각도 사람들이 인정할 수 없는 외계 생명체이기 때문에, 
어쩌면 사랑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은 정말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며 일종의 합리화랄까, 

고독과 쓸쓸함의 현실적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왜인지 알 길도 없어서 
가장 편하게, 나는 외계인이 되었고 그는 비단뱀이 되었다.

숨어들면, 어딘가로 숨어들어서 내가 나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래 속에 머리를 박은 타조처럼 숨어들어서 타조처럼 저 멀리 땅을 통해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 우리로선 사람들의 표정, 몸짓, 말투 하나하나를 느끼려 드는 것이다, 기민하게 반응하여 피하고 도망치고 멋대로 오해하고 

군더더기 없는 내 자신으로서, 나약함과 비겁함을 드러내고 - 다자이 오사무나 김기덕감독처럼- 마음 깊이 하고 싶었던, 마음깊이 생각했던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펼쳐놓다보면 

그 자체, 나약하고 비겁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보적이고 사랑받아 마땅한 
그런 존재로 거듭나게 된달까a

말을 해도 되냐고? 손가락질 받을까 두렵다고?

괜찮아, 우리는 모두와 같이 다르니까!! 

내가 요즘 느낀건데 사람은 끼리끼리 놀아서 그런건진 잘 몰라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두 다 특이하다니까, 다들 외계인이었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