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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수웠던 날들

[독후감] 노동의 가치에 대하여

by 살랑상아님 2015. 1. 25.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국내도서
저자 : 이반 일리치 / 허택역
출판 : 느린걸음 201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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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
국내도서
저자 : 박노해
출판 : 느린걸음 201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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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국내도서
저자 : 한병철(Han Byung-Chul) / 김태환역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1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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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국내도서
저자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 정영목역
출판 : 은행나무 2012.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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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 순서대로 읽는다면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 묶음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a


일을 시작하고 어느 날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분명 일을 하고 있는데 소비만 하고 있었다. 소비만. 

생산이라고 볼 수도 있었을 그 '일'이라는 것 역시 소비라는 것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1984년 초판이 발행된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은 국내의 급진적 산업화 시대에 대지주들의 욕심으로 말미암은 횡포들, 즉 무분별한 착취와 부조리 속을 맨 몸으로 헤쳐나온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사람마저 기계화시키고 인정도 삶도 모두 말살당한 그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가 나라를 잃은 우리의 조상들에 대한 핍박과 억압, 그리고 문화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의 시대였다면

그 시대, 산업화 사회는 바로 노동이 주는 자유와 기쁨에 대한 핍박과 억압, 그리고 정신적인 풍요의 말살과 그에 대한 저항 시대가 아닐까 싶다. 


바로 그런 시대를 시로써 이야기한 사람이 박노해 시인이며 시인이 직접 그 시대를 살아오며 느꼈고, 겪었고, 저항하고, 헤쳐나온 과정에 대하여 시집 '노동의 새벽'을 통해 그토록 생생하게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의 세포에까지 전달해 주고 있다. 


그토록 절박한 심정으로 이루어낸 것들은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삶의 곳곳, 우리 사회의 제도와 모습을 통해 알 수가 있다. 

곧, 지금이라면 말도 안 된다며 손사레를 쳤을 그 모든 일들이, 지금의 우리 세대에게 있어 당연함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는 것들이 

바로 그 시대를 저항해주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는 것. 


아직 우리나라는 갈 길이 멀다. 아니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악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이미 그런 시대를 겪고 그 다음 세대에 만큼은 절대 이런 악습을 물려주지 않겠다며 저항해 주시고 희생해준 덕에 만들어진 사회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현상이 그 대단한 전문가들이 말하는 개발도상국이나 최빈개도국에서 똑같이 벌어질까봐 겁이 났다. 

이미 우리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산업화의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부조리한 핍박과 억압의 피 비린내 나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 있다. 

자살율과 실업율은 늘어났고, 자신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청년은 거의 없으며, 사회가 정해놓은 틀에 맞춰지지 않으면 불안에 떨게 되었다. 매년 쏟아져 나오는 기사에 맞춰 88만원 세대라는 딱지에 스스로 자포자기 하기 시작했다. 연봉에 의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하는 일의 가치가 매겨진다. 연봉이나 사회적 지위로 평가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저 무능력한 낙오자가 되어야만 한다. 

어른들은 자식에게 안정적인 직장에 평생을 바치길 권유하고, 딱 남들만큼만 살기를 종용한다. 

본능에 철저하게 살기를. 

그저 안락한 집과 풍요로운 식탁과 따뜻한 옷. 그로 말미암은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후대를 생산하기 위한 조건의 충족.

그 충족된 조건을 찾아 짝짓기를 하고 후대를 생산해 내고, 보다 강하고 경쟁력있는 후대를 만들어 내는 데에만 몰두해있다. 


사회의 규격화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는 어느 곳에 가든 프랜차이즈 점포를 통해 익숙함을 누릴 수 있고, 텔레비젼을 통해 웃을 수 있고,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다. 

꼭 전문가가 아니어도, 기업에 의해서, 사람들에 의해서 검증되고 규격화된 어떤 것들, 그것이 감정이건, 서비스 건 상품이건 간에.

길들여지고 있다. 모두가 수동적이 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의견을 정당한 방법으로 내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폭발시켜 버린다.

정당한 언론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각종 범죄와 사회 문제들이 곧곧에서 터져나온다.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곪아터져 결국엔 암으로 발전하는 환자가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암 생겨'라는 말이 우스갯 소리가 되어버렸다. 


너무나도 반듯반듯하게 만들어지고 가공되어진 수많은 상품들이 넘쳐난다. 

더이상 손 수 뜬 목도리나, 손 수 만든 연이라거나 심지어 손수만든 음식까지도.

수제라는 개개인의 생산품은 그 제품이 갖는 '시간'에 대비한 질과 양과 효율성에 의해 평가절하되기 십상이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언제 그걸 다 만들고 있어. 시장에 가서 하나 사면 그만인 것을.'


수제라는 것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도 드물다. 

세상은 규격화 되었고 시간과 돈을 함께 따져보았을 때, 효율적인 답을 찾아서 떠다니게 되었다.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어떤 물건들에 대한 향수는 이제 90년 대 이전 세대가 가슴 속 깊이 품어버린 낭만, 혹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매개' 혹은 매니아 '상품'으로 전락해버렸다. 


적어도 20-30년 일상 생활의 거의 모든 물건들을 손수 만들고 다듬어 쓸 줄 아는 기술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시골에서 소를 기르는 우리 아버지는 직접 소새끼를 받으셨고, 책상을 만들어 주셨다. 

그런 일들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을에서 인기인이었다. 하지만 또 배우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가 새끼를 낳을 땐, 수의사를 통해, 책상은 시장이건 인터넷에서건 아주 싼 값에 지구 환경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플라스틱 혹은 계산되어진 생산에의해 무차별 벌목당한 나무들로 만들어져있는 것을 손쉽게 클릭 몇 번으로 소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20세기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그 오랜 세대 동안 지속해오던 농사일, 혹은 시장통을 전전하며 살아오던 삶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공장에 가서 하루 종일 같은 일을 반복하며 매달 일정한 금액의 보수를 받고 그 보수로 다시 자신들의 생산한 재화를 구매하며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손과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고정된 소득을 통해 적어도 배를 곪을 일은 없어진 삶.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1978년 이반 일리치가 52세 때 쓰여진 책이다. 

그때 이미 이반 일리치의 시야에 들어온 그 현대화된 가난은 지금 현재까지 증식하여 이제 더이상 걷잡을 수없는 사회적 불치병이 되어버렸다. 왜 그렇게 되어버린 걸까?


산업화되지 않은, 현대화된 가난에 전염되지 않은 사회는 지금도 여러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 스스로 선진국이라 자칭하며 그들의 잣대로 개발도상국, 최빈개도국이라고 명명지어놓은 바로 그 국가들.

그곳에서는 낮에는 사람들의 웃음 소리, 밤에는 사람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들의 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직접 만든 옷들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으며, 그들이 직접 만든 여러 장신구들과 생활용품들을, 그리고 그들이 직접 지어 만든 집을 볼 수 있다. 


가난하지만 그들은 행복하다. 

지금 우리가 다시 벤치마킹해야할 곳은 선진국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늘 웃음 속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바로 그 나라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들이 스스로 행하는 의술을 전문가들은 민간요법, 혹은 주술이라고 칭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미개하고 얼토당토 않은 미신 혹은 위험성 높은 불법 의술로 치부되었다. 

정당할까. 



'필요한 만큼만 취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워진 사회.


'현대화된 가난'에 전염된 사람들은 

넉넉하지만 한없이 부족하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통장 잔고를 불린다.

소유할 수록 소유가 고프다. 가진 것이 많을 수록 불안해지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정색하고 방어해가며 하루를 버텨낸다. 

웃을 여유가 없다. 당장 더 많은 것을 모으기 위해서는 밤 하늘의 별을 볼 여유따위는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



이 모든 것들이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를 통해 이미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째서 이 현상을 막을 수 없었을까, 그리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 

생각해보건데 최대 수혜자들의 걷잡을 수 없는 욕심과 그 반열에 들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은 자들의 욕망과 

그들의 욕심과 욕망에 저항하지 못한 '부족한 용기와 현실 안주, 좁은 시야'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바로 그 저항의 기록이 '노동의 새벽'이 아닐까 싶다. 


박노해 시인의 말대로 작은 노력이, 서두르지 않지만 결코 쉬지는 않으며 두 손을 맞잡고 당당하게 나아 가는 바로 그 작은 노력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언젠가는 개개인의 개성과 취향이 존중 받게 되고 결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들이 인정받게 되는 세상이 

아니 그 인정이라는 개념조차 사라져 그저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하늘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대한 이로 존경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도록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이미 거쳐온 산업사회로 말미암은 문제에 대한 제기이며

'노동의 새벽'은 산업사회를 거쳐 민주주의를 통해 그 부조리를 헤쳐나오기 위해 품었던 문제의식와 단단한 정신력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가 현대 사회가 품고 있는 문제점(현대화된 가난)에 대하여 직시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주었다면 

'노동의 새벽'은 이미 한 시대를 변화시킨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이 문제의 극복 가능성, 그리고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단단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노동과 삶에 대한 책을 연달아 읽으니 

알래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과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계속 머릿속을 떠돌았다. 


2012년 5월에 읽었던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감상은 '일의 기쁨을 알고 있다면 읽지 말 것'

반대로 말하자면 일의 기쁨을 모른다면 읽어 볼만 하다는 뜻일 것이다. 

2013년 12월에 읽은 '피로사회'는 바로 그런 일의 기쁨을 모르는 채, 목적이 전도되어 버린 노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빨래 짜듯이 자신을 쥐어짜내며 성과를 내기에 급급하다. 일 혹은 돈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에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잃은 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모습을 꼬집어낸 책이다. 


일을 할 때, 바로 그 일로 말미암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수혜를 받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면 

그 일의 가치는 커진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지 알게 되고 그렇게 일을 함으로써 내가 기여하는 바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 가치를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당장 통장에 찍힌 월급의 액수가 아니다. 

일을 함으로써 얻은 돈은 그 수혜자에게 기쁨 혹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요즘 세상은 그 액수 자체로 수혜자가 누구인지와는 관계없이 개인의 가치를 따지려 든다. 


수혜자에 대한 덕이 커질 수록 개인의 덕도 커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신이든, 가족이든, 북극곰이든, 지구온난화로인해 경작지를 잃은 가난한 어떤 나라의 노파이든. 


일의 기쁨은 그일이 가정적이거나, 국가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지구적으로 기여하는 바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로 그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데이 있어 한 몫을 하고 있다라는 자부심. 

그렇다고 너무 오바해서 자신의 삶을 좀먹을 정도로 쥐어짜내는 정도는 아닌, 합리성을 겸비해야 하지 않을까.